누구나 가슴 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 쯤은 묻어두고 살 것입니다. 소중한 추억은 책장 속에 먼지 쌓인 앨범처럼 평소 기억도 나지 않다가 무심결에 떠올라 입가에 동그란 미소가 맴돌게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제 자신의 옛 모습이 아이들 속에 나타나 사라지곤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해대는 나쁜 선생님입니다.
“친구랑 싸우면 나쁜 사람이지.”
“공부 열심히 안하니? 집중해야지, 집중!”
“아이구 시끄러워라. 입 꼬옥 다물자.”
“청소는 다했니? 이 먼지 좀 봐. 비질 제대로 안 할거야?”
“급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선생님이 너만 할 때…….”
날마다 해도 해도 끝없이 이어지는 이 잔소리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제가 선생님들께 들어오던 귀에 익은 소리들입니다. 제가 지겹도록 들었던 듣기 싫은 소리를 왜 저는 다시 아이들에게 반복하고 있을까요? 도통 모를 일입니다.
저희 반에는 잡다한 지식이 풍부하고 유난히 질문 많은 한 아이가 있습니다. 또래 아이들 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이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옛날의 나를 닮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까지 저는 말 없고 조용한, 있어도 존재감 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고집은 무척 세고 궁금한 것도 많은 아이였던 저는 선생님들에게 예쁨 받지 못했습니다.
성적은 12명 중 딱 중간, 튀지도 않는 이 아이는 질문으로 선생님들을 귀찮게 했습니다. 꾸중과 벌을 반복하며 저는 머릿속에 맴도는 답답함을 가슴으로 삭이는 법을 점차 배웠고 점점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렇게만 살았더라면 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연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분교에 새로 오신 이 선생님은 큰 안경을 쓰시고 머리는 퍼머를 하고 계셨습니다. 예쁘지는 않지만 미소가 따뜻한 우리 큰 이모를 닮은 이 선생님이 어쩐지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선 이 선생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은 ‘자신감을 가져라’ 였습니다. 자신감이라, 제겐 너무나 생소하고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말이였죠. 발표를 하고, 질문을 하고, 끊임없이 친구들과 싸우면서 세상을 배워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파크가 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선생님들과는 뭔가가 다른 사람이구나, 바뀔 거야.
그 날 이후 선생님은 제게 다른 세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낯설고 신기한, 그리고 즐거운 세상이 보였습니다. 수업시간에 언제나 질문을 할 수 있었고 쉬는 시간에도 선생님 옆에 언제나 붙어 앉아 궁금증을 해결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눈가의 고운 주름을 접으시며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나긋한, 살짝 졸리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싸워도 절대 누군가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장난을 치다 화분이 깨져도 말없이 어떻게 하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실 뿐이였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치우면 참 잘했다고 다음에도 그렇게 하자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염치 없는 행동이었나,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저는 이제 그 때의 그 선생님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달고 보니, 당시의 이연례 선생님께서 베푸신 그 따스함이 얼마나 큰 노력과 사랑과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힘이 듭니다. 저는 선생님으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 사건의 중심에 선생님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아이들과 똑같이 화내고, 웃고, 삐지곤 합니다. 언제쯤 나는 선생님의 모습을 티끌이라도 닮아볼까요?
나는 누군가의 인생의 일부이자 그 인생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선생님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선생님일까요? 나라는 사람으로 인해 어떤 아이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습니다. 하루하루, 일 분 일 초를 귀하게 여기며 조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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