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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15

내가 걷는 길가에... 거님길? 산책이란 낱말이 물려 거닐다는 말을 써서 거님길(거닐다, 거닐면서,,,) 벅찬 운동이 아닌 가벼운 걷기를 시작했다. 나의 산책, 아니 나의 거님길. 그 길가에 함께 한 꽃들과 풍경...산새소리 덕암사의 뒷편을 지나 오르는 거님길. 삐비가 활짝 피었다. 덕암산 꼭대기에서 보이는 장면들이다. 남쪽으로 신지도의 상산이 보인다. 서남쪽으로 완도의 상황산자락이, 그 아래 고금도 봉황산, 그 아래 넓은 장중리 벌판, 백운동저수지가 보인다. 동남쪽으로 덕암산아래 면소재지 석치마을이 조금 보인다. 어릴 적에 뱀딸이라고 요거 먹을려면 눈썹하나 뽑아야 했다. 정말 눈썹을 뽑았었다. 산딸기다. 따서 먹으면 씨가 씹힌다. 한창 영글고 있다. 산딸기떼가 모여 있으면, 심봤다는 느낌이다. 2011. 6. 13.
묘당도 이야기 - 김광열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 5 (고금도 사람들)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이곳 월송대에서 임시로 모셨다. 이듬해 충남 아산으로 옮길 때 까지 가묘로 있었다. 장군을 모셨던 자리엔 지금까지 풀이 자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돌아가셔서 까지 바다를 굽어 살피려고 하는 장군의 기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덕동마을 김광열 옹(74)은 묘당도이야기를 마치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듯이 말씀하셨다. 노량해전으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시신은 배를 타고 우리수군의 본영이었던 덕동진으로 돌아와서 묘당도 언덕(월송대)에 임시 안치된다. 그곳에 관왕묘가 있었기 때문에 묘당도라고 했다는 정설이 있어서 김광열 옹의 얘기가 틀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성들은 묘한 집이 들어서서 묘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상상으로 재해.. 2011. 6. 3.
제466주년 충무공이순신 탄신기념대제 충무사에서 열려 지난 4월 28일, 고금면 충무사(사적 114호)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제466주년 기념대제가 열렸다.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회(위원장 이상철)가 주관한 이날 행사엔 박종연 군의원을 비롯한 관내 기관,사회 단체장 및 지역유림들과 양성 이씨 종친회등 200여명이 참여해 보존위원회의 전통예식으로 다례제를 올리고 헌화 및 분향했다. 이상철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장은 기념사에서 "4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충무공의 상여채를 붙잡고 쓰러졌을 고금도민의 심정으로 그때를 회상한다" 며 "충무공은 우리에게 인자한 대지요 찬란한 태양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태양의 고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신기념 다례제를 엄숙히 거행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와 같은 행사를 진행하는 수많은 곳 중에서 더.. 2011. 4. 30.
고금유림의 요람 6원사를 찾아 - 영모사 영모사는 고금면 연동리에 있다. 이 마을은 순조 11년, 홍병례선생이 귀양살이 하면서 지형이 처마밑 제비집과 같다하여 燕巢洞(연소동)이라 지었다가 지금의 연동이 되었다. 영모사는 이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좁은 길로 올라가야 한다. 비명) 용남 홍선생 수암 배선생 화정 윤선생 기념비 1963년 3월 건립. 비문 요약) 용남 홍선생의 휘는 병례, 자는 경지, 남양인이다. 가계는 잘나가던 명문세족이었으나 사화를 입어 순조 11년(1810년)에 유배오다. 고종 갑자년(1864년)에 유배가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그 문하생 대표 배경룡, 정한교, 배의정, 김이의 등이 의로써 봉양하며 영모사를 지어 중양제를 지내고 있다. 수암 배선생의 휘는 학연, 자는 도명, 성산인이다.. 2010. 10. 3.
삼문산에 올라 - 망봉에서 다도해를 굽어보니 조약도(약산면) 삼문산에 올랐다.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는 것도 복이련만 가까이 사는 우린 정작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산다. 조약도에서 제일 높은 곳, 삼문산 정상은 망봉(해발 397m)이라 했다. 옛날, 신지의 상산과 장흥의 천관산과 봉화를 올려 연락하던 봉수대터가 남아있다. 망본다는 뜻그대로 사방이 다 보인다. 바다를 굽어보니 섬들을 휘감는 물결이 마치 비단같다. 망봉의 봉화대에서 남쪽으로 바라본다. 뿌연 안개 때문에 사진이 깨끗하지 않다. 맑게 개이면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희끄므레 청산도가 눈에 잡힌다. 망봉에 서서 서쪽을 향하면 고금도 덕동마을과 조약도(약산)천동마을 사이를 금파강이 흐른다. 비단처럼 물결이 흐른다 하여 이렇게 지었을까? 금파강(錦波江)! 고금도와 조약도를 나누는 해협의 이.. 2010. 9. 19.
고금유림의 요람 6원사를 찾아 - 숭유사 조선은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베풀었다. 조선의 정치,사회,문화를 통틀어 유학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이 따라야 할 양식이었다. 각 지방마다 유명한 서원이 있었고, 서당은 보통사람들의 기초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원(院).사(祠) 는 이러한 유교문화가 낳은 것으로 기품있는 스승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섬이라하여 유학의 가르침이 미치지 않을 것인가? 고금도는 유배지인 까닭에 중앙의 사대부들이 수없이 다녀갔다. 정쟁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이곳에 온 사대부들은 유배가 풀리기도 하고 아예 이곳에 정착하기도하고, 중앙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치기도 했다. 고금도사람들은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고금도는 완도의 다른 섬들에 비해 유풍이 강한 .. 2010.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