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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린8

관왕묘비문 해석 충무사들어서서 홍살문, 외삼문, 중삼문을 지나면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관왕묘비가 있는 비각은 서재 건물뒤에 있다. 안내표지가 없고 서재에 가려 비각이 보이지 않는다. 탐방객들은 이 비각을 놓치기 쉽다. 관왕묘비의 위치를 옮기든지 비각앞의 담장에 문을 내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많다. 우선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해야겠다. 높이 253cm, 넓이 93cm, 폭 20cm로 1713년에 건립된 이 비는 충무사의 역사를 알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린장군이 관우사당을 세운 것에서 시작하여 이 비가 세워지기 까지, 관우,진린,이순신을 함께 배향하는 의미, 진린과 이순신의 사귐이 간담이 통하였다는 내용, 진린이 이순신장군을 극진히 존경하여 경천위지의 재라고 극찬하는 내용들이 새겨져 .. 2011. 12. 24.
묘당도 이야기 - 김광열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 5 (고금도 사람들)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이곳 월송대에서 임시로 모셨다. 이듬해 충남 아산으로 옮길 때 까지 가묘로 있었다. 장군을 모셨던 자리엔 지금까지 풀이 자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돌아가셔서 까지 바다를 굽어 살피려고 하는 장군의 기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덕동마을 김광열 옹(74)은 묘당도이야기를 마치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듯이 말씀하셨다. 노량해전으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시신은 배를 타고 우리수군의 본영이었던 덕동진으로 돌아와서 묘당도 언덕(월송대)에 임시 안치된다. 그곳에 관왕묘가 있었기 때문에 묘당도라고 했다는 정설이 있어서 김광열 옹의 얘기가 틀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성들은 묘한 집이 들어서서 묘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상상으로 재해.. 2011. 6. 3.
돌, 임진왜란때 무기로 사용했다. - 김광열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 1 (고금도사람들) 첫 만남, 김광열 옹(74)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만난 적은 없지만, 마치 백기완 선생과 만나는 그런 것이리라는 착각이 들었다. 말씀하시는 모습을 볼라치면 노래가락처럼 점점 흥을 돋구다 "아, 그거 참!"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김광열 옹의 얘기는 나이 어린 우리 두사람의 마음을 빼앗았다. 말속에 열정이 담겨 있었다. 벗과 나는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밥 때가 훨씬 지나서야 다음에 또 뵙기로 하고 문밖을 나섰다. 바닷가 마을 집집마다 뒤꼍에 울창하게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왕대와 신의대가 눈에 들어 왔다. 저 풍경이 이젠 예사롭지가 않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 이곳에서 왜적을 물리치려 했던 고금도사람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2011. 5. 22.
제466주년 충무공이순신 탄신기념대제 충무사에서 열려 지난 4월 28일, 고금면 충무사(사적 114호)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제466주년 기념대제가 열렸다.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회(위원장 이상철)가 주관한 이날 행사엔 박종연 군의원을 비롯한 관내 기관,사회 단체장 및 지역유림들과 양성 이씨 종친회등 200여명이 참여해 보존위원회의 전통예식으로 다례제를 올리고 헌화 및 분향했다. 이상철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장은 기념사에서 "4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충무공의 상여채를 붙잡고 쓰러졌을 고금도민의 심정으로 그때를 회상한다" 며 "충무공은 우리에게 인자한 대지요 찬란한 태양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태양의 고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신기념 다례제를 엄숙히 거행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와 같은 행사를 진행하는 수많은 곳 중에서 더.. 2011. 4. 30.
망덕산(望德山)에 올라 화성마을바닷가에 보이는 풍경이다. 매생이 발이 박혀있는 썰물에 큰개섬이 보인다.1872년에 제작된 지방도 고금도진지도엔 가지도(加枝島)라 명기되어 있다. 참왜도 - 이순신장군의 아들 면을 죽인 왜군을 붙잡아 이곳에서 죽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화성마을 앞에 있는 큰개섬과 나란히 놓여있다.망덕산에 오른다. 임진왜란때 수군본영이 자리잡은 덕동마을 뒷편에 우뚝솟아 있다. 수군통제영이 있을 때 봉수대와 왜군의 상황을 전망했던 곳이다.망덕산 오르는 중에 묘당도가 잡힌다. 이곳엔 정유재란때 명나라 구원군 진린장군의 부대 2,500명이 주둔했다.명나라 구원군은 5천명의 규모로 덕동마을에 당도하여 묘당도와 척찬리에 각각 2천5백명이 주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우리 수군은 덕동본진에 주둔했다. 묘당도는 일제.. 2010. 11. 9.
고금도해전! - 한중일 세나라가 고금도에서 만나다.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진다. 당시 지배계급의 해이는 한반도를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몰고 갔고 (왜 10만양병설을 무시했는지) 그때문에 이땅의 민중들은 나라가 보호해주지 못한 삶을 지키려고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우리의 수군과 의병, 명나라 구원군이 똘똘뭉쳐 막아낸 해전. 바다에서 왜는 기를 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정왜기공도 - 임진왜란의 생생한 장면을 중국의 종군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현장감이 넘친다. 이순신의 빛나는 해전사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하는 고금도해전, 역사가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기에 우린 400여년전, 이 땅에서 한중일이 만났던 이 역사적사건을 다시 끄집어 낼 수 있다. 고금도는 정유재란때 우리수군의 통제영이었다. 또한, .. 201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