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겨울, 친구가 진홍색표지의 작은 책을 읽어보라며 내밀었다.
방향을 잃어버린 채 떠다니는 조각배와 같았던 나.
MBC드라마 "서울의 달" 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1년 남짓 서울 생활을 불안하게 살고 있었다. 서울은 높은 빌딩과 아파트로 메워져 있을 뿐 무작정 상경한 젊은 열정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지한 방황을 하고 있었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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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십여년만에 죽마고우와 만났다. 그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날을 새우며 이런 저런 세상얘기를 하게 되었다. 서로 근황을 묻다 서로 현실에 안타까워 했다. 친구는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어디 대학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학업을 중단할 만한 일이 생겼나 보다, 짐작했다. 나또한 변변치 못한 일상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던 거 같다.
얘기를 나누다 친구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친구는 세상문제에 대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는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고 내게 여러 책제목과 출판사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을 내게 주었다.
그때부터 세상을 보는 인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섬에서 올라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실패한 인생. 검정고시준비와 대학진학을 위해 세월만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터무니 없는 불만, 넋두리, 비아냥만 있었던 스무살 너머. 이 책을 만나고 조금 더 진지해진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지? 라는 의문부터 수많은 고민들에 대해 의문과 해결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거대한 세상에 하챦은 나의 존재는 이 책을 통하여 작은 실마리를 찾게 된다.
책속의 내용은 기본적인 철학입문, 원숭이와 인간, 산을 오르는 등산가와 같은 비유는 철학의 사색으로 차근차근 나를 이끌었다. 책은 유물론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학교에서 배워오던 것과 달랐다. 교과서란 진리자체였다. 그것을 뒤집는 전혀 다른 변증법과 인식론, 하부구조 상부구조니 하는 낯선 철학용어들을 공부했다. 점점 사회과학 서적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소설보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은 유명한 출판사들 백산서당, 사계절, 동녘, 한길사. 창작과 비평사들에서 펴낸 것들이었다.
이 책은 스무살의 나에게 세상은 어떤 이치로 움직이고 있으며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 가를 깨닫게 했다. 하지만,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다고 끊이지 않는 궁금증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모태로 한 소련의 사회주의체제가 하나 둘 무너지면서 이땅의 진보주의자들은 설곳을 잃는다. 나도 혼란에 빠졌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반독재와 반민주 투쟁으로 뭉쳤던 민중들은 6월항쟁이후 목마름을 해갈할 정도의 민주주의의 진전을 맛보았다. 20년전과 비교해보면 우리사회는 분명 발전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유물사관은 현재 유효할까. 과연 어느정도?
케케묵은 거라고 이런 책들이 버려질지 모른다. 이책을 읽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지금 책장을 정리하며 이런 류의 서적들을 처분하려고 할 지 모른다. 헌 책방에 쌓여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책을 읽을까?
어쨌든 내 청춘의 철학적 사유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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