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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Wando고금도Gogeumdo

고금도에 온 유배인물 - 심재 이도재 공, 완도군을 만들다.

by ☆ Libra 2010. 8. 16.
 1884년, 개화파의 쿠데타는 청나라의 간섭으로 3일천하로 끝난다. 갑신정변이다. 정변을 일으킨 핵심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이와 관련된 사람, 이도재는 고금도로 종신 유배를 오게된다. 1886년부터 1894년, 김홍집내각이 등장할 때까지 약 9년간 고금도에 살면서 고금도사람들과 각별한 유대를 갖게 된다. 1894년 유배에서 풀려나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당시 추진하였던 나라의 행정구역개편안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군을 세울 계획을 추진한다.


<사진 : 심재 이도재>  


 1895년 봄. 전라감사 이도재와 고금도민들이 덕동마을에 모였다. 이도재가 당시 해남,강진,장흥,고흥들에 나누어져 속해 있던 섬들을 모아 새로운 군을 만들고자 하면서 군청을 고금면 대평리(지금의 일덕암리)로 하고자 했으나, 지역유림들이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관아가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번적스럽고 그동안 관의 착취와 핍박을 받아오던 민중들은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다고. 고금도사람들의 부탁이라면 거역할 수 없는 지라, 가리포진지(현재 완도읍)에 군청이 서게 되었다. 완도군은 1896년 신설된다. 

 완도군의 설군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이도재. 하지만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격변기. 그가 구한말의 꿋꿋한 선비정신을 고금도에 심어놓고 고금도를 떠나 복직 되었을 때 중앙정치에 휘둘려 안타깝게도 역사적인 사건인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받게 된다.
그가 전라감사였기 때문이다.
  

 고금도를 이도재가 다녀간 후에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탐관오리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금도로 유배된다. 고금도엔
당파싸움의 희생으로 오게 된 대쪽같은 선비들도 있지만, 탐관오리와 같은 인물도 있어 한 유배지에 시간차를 두고 유배 온 사람들의 입지가 서로 다른 것은 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고금도사람들은 유배인물들과 교류를 나름의 판단으로 일구어냈다.

 이도재 공은 구한말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조선의 선비라 할 수 있다.

구한말의 두가지 흐름 개화파와 위정척사운동사이에 그는 어떤 입장이었는가?
그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불운을 겪게 되는 그의 일생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완도군은 이도재를 기억한다. 고금도에서 살았던 9년은 고금도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했고 그것은
완도를 독립된 편제로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설군의 의미와 그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미흡하다. 고금도에 공의 적거지가 하나 복원되어 있고, 완도읍에 공적비 몇 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자료의 발굴을 통하여 이도재 공 설군 기념관을 마련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고금도와 더불어 유배지로 유명한 신지도까지 통틀어 유배인물 기념관을 설립하여 유배인물들이 남기고 간 업적과 구한말의 격동치는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역사문화사료들은 현실에 맞게 재탄생시켜야 한다. 장보고와 이순신, 유배인물사, 민중들의 바닷가 생활과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은 총체적 관광정책을 수립하여 추진하면 좋겠다.

                                        
     < 완도군 고금면 일덕암리에 있는 이도재 공 적거지 - 공은 고금도에서 몇군데 처소를 옮겨 다녔다. 사료발굴과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적거지를 찾아야 한다. >



이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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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재(李道宰, 1848년 ~ 1909년)는 조선, 대한제국의 문신이다. 호는 심재(心齋), 운정(篔汀), 자는 성일(聖一),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친아버지는 이명익(李溟翼)이며, 이건익(李建翼)에게 입양을 했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82년(고종 19년)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후 경상좌도암행어사, 동부승지, 참의군국사무,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86년 호군(護軍)에 재직중 사대당에 의해 고금도로 귀양을 갔으며, 1894년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면서 풀려났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가서 전봉준을 생포하는 공을 세웠고, 1895년 관제개혁 때 전주부 관찰사로 옮겼다.

군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나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다시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민간실업자와 조신(朝臣) 중의 유력자를 모아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1907년(광무 11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의 양위에 관해 논의하기 위하여 어전회의가 개회되자, 질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이 양위하자 박영효, 남정철(南廷哲) 등과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 2연대의 지원으로 같은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때 고종의 양위를 결정한 신하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2005년 8월 3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