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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도 이야기 - 김광열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 5 (고금도 사람들)

by ☆ Libra 2011. 6. 3.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이곳 월송대에서 임시로 모셨다. 이듬해 충남 아산으로 옮길 때 까지 가묘로 있었다.  장군을 모셨던 자리엔 지금까지 풀이 자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돌아가셔서 까지 바다를 굽어 살피려고 하는 장군의 기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덕동마을 김광열 옹(74)은 묘당도이야기를  마치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듯이 말씀하셨다. 노량해전으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시신은 배를 타고 우리수군의 본영이었던 덕동진으로 돌아와서 묘당도 언덕(월송대)에 임시 안치된다. 그곳에 관왕묘가 있었기 때문에 묘당도라고 했다는 정설이 있어서 김광열 옹의 얘기가 틀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성들은 묘한 집이 들어서서 묘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상상으로 재해석 되는 것이다. 민중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새롭게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역사와 진짜 역사 사이의 틈을 줄여가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사라질 이야기를 김광열 옹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다.   

 "인자 재밌는 얘기하나 있어. 묘당이여, 충무리는 우리가 어른돼서 늙어감시롱 여그(덕동)하고 분가해가꼬 충무리라고 했단 말이여, 원래 묘당이여. 왜 묘당이라 했을 까?
이순신장군 시신을 안치 했던 자리와 관련있어, 묘할 에 집 자여.

왜 묘당이라고 했을까? 내가 물어봤어, 한자를 안다는 사람들, 장의나 출세한 사람들 한테, 왜 묘당이라 했것소? 물으니까 '비석이 물로 떠와서 묘하다 해서 묘당이라 했다고 하
데'그래. 비석이 물에 뜬단 말은 상상이고, 왜 그렇게 돌이 물로 떠온다고 했을까? 이것은 헛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여. 

 나도 이것이 잘못된 말이다. 어떻게 비석이 물우에 떠오겄냐, 이렇게 생각했더니 그래도 이 말이 나온 이유는 뭐가 있것다 상상이 와. 물에 뜬 돌 봤는가?  제주가면 맨돌이 떠, 바늘대로 구멍이 듬성듬성해가지고 물욱에 버큼(거품) 처럼 떠, 버큼돌 있어, 용암이 흘러서 굳어진 돌이 가벼운 돌있어, 제주도에서 이것을 가져다 바늘을 갈았어. 그 바늘독이 바로 물에서 떠, 그것은 아니고 비석이라고 하면 글씨를 새긴...


 내가 얘기를 재밌게 할랑게 거꾸로 한디, 이순신장군이 돌아가실 때 억지로 (죽었을 지도 몰라), 전쟁이 다 끝났다, 인자, 일본놈들이 들어가기로 확약을 받았다. 그 전쟁이 마지막 전쟁이여, 그 역사 얘기는 자네들이 더 잘 알 것 같고, 그 당시에(이순신장군이) 갑옷을 벗었단 얘기도 있고, 살아가 봤자 고향에서도 죽고, 가 봤자 처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진하니 일본놈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내 일생은  영웅이다. 노무현같은 생각을 했어, 그래서 스스로 ... 

 오직이 여러 번 전쟁을 할 때 (장군이) 산 이유는 자기 부하들이 둘러 에워 쌌은 께 살았것제. (왜군이) 맨 이순신만 보고 총을 겨눴는디 살아있는 걸 본께.

 그란디 그날은 전부 다 배제를 했것어. 노출돼서 화살을 쏘고 돌
아가셨는디 돌아가실 때 말은 또 유명하제, 절대 알리지 마라, 누구한테든지 알리지 마라, 적이건 아군이건 알리지 말라, 아군이 알면 용기가 없어지고 헤어 질 것이고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 온다. 적이 알면 기세가 나서...그 뭐 설명할 필요 없제이.

 그렇다면 돌아 가실 때 부하들이 몇명이 있는디 극비로 해서 시신을 안장해 놨것제.  몰게 여까지 싫어 올때 여기 있는 군사들이고 우리 아군들 한테 절대 비밀로 해야 제이.
 (전쟁터에선)
이순신장군 부하중에 한 명이 이순신장군 옷을 입었을 것이여, 거기 이순신이 또 하나 있든마. 같은 이름이 있는 부하가 있어. 그런 분네들이 장군 옷을 입고 지휘를 했을 것이란 말이여. 일본놈들이 계약이 우리 돌아갈 때 길을 좀 터주라, 우리 갈란다 했거든, 종말인 줄  알고 그 전쟁에서 돌아가신 거여.

 그라믄 몰게
이리 안돌아 오겠는가? 여기 진있는디로. 모두 다 이순신장군이 승리해서 올 것이라고 주민들이고 군사들이고 다 나왔겄제. 이순신장군 볼라고, 그라제마는 못보게 맨들었을 테제. 시신을 모르게 그 섬(묘당도) 갯짝지에다 내려 놨어. 시신을 덮어 놨을 때 글씨를 썼을 것 같어, 이순신 장군 지구 라고 관에다 쓰제. 이순신 장군의 관이라고 글씨를 썼것어,

 그라면 우리 아군들 모르게 어따 보관을 해야 겄는디, 섬인께  사람들이 없겄제. 그래서 거그다가 안치를 할라 했닥 하먼, 달밤에 인부를 불러다가 몇이 마람도 가져오고, 뭉둥이도 베아다가...(전쟁이) 언제끝날 지 모릉게, 일본놈들이 다 들어가야 선포를 하고 울고 불고 할 거인께, 가묘를 맨들라면 스지부지하니 땅위에다가 하것는가?  
 
 최대한 목나무라도 베고 농사지은 마람도 갖다가 집을 지어야 되것제. 산위에다, 나중에 그 자리 봐봐. 거그다 안치를 하면 집도 아니고 무슨 묘한 집이 되것제? 마람으로 둘러싸서 비도 안들치게 해 놨으면...


 그래서 그것이 묘한 집이여. 묘당.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줄 모른디  갑자기 먼 집이 하나 생겼어. 움막도 아니고 초분인데, 보통사람들 하고는 다르게 했을 거여, 웅장하니 보초도 세우고 갑자기 묘한 집이 세워져서  거기서 보초를 서라 하고...

'묘당 가 봤는가' '묘당 보초섰냐?' 틀림없이 날새기 주야로 섰겄어. 가만 내비 뒀겄는가.

그 당시에 얼마나 예의가 바르다고. 이순신장군이 우리나라 최고의 사령관, 우리 백성의 원수를 갚은 장군이 누워 있는디 밤낮으로 보초를 섰겄지. 그렇게 묘당으로 이름이 나부렀어.

 아까 뜬 돌 얘기했제. (갯짝지에 내린 이순신장군의 영구에  글씨 써진 것을)  언뜩 본께 먼 비석같이 생겼어, 그래 일꾼들이 와서  '먼 비석을 옮기라 합니까?' '응, 엊저녁 물에 떠왔다.' 이랬것어. 이렇게 거짓말 한 것이, 그냥 물어 본 일꾼이 거짓말을 맨들어 줬어.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전해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