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느 곳이나 시대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대의 일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역사유적지는 후대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대단한 것이 되든지 하챦은 것이 되곤 한다. 완도군 고금면에 있는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 충무사의 유래를 살피다 보면 이 곳도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그 가치가 도드라졌다가 시들기를 되풀이 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늘 이곳을 소중히 가꾸고자 했다. 선조들은 이곳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 사당으로들어가는 곳에 대소인원개하마비 (大小人員皆下馬碑)를 세우고 누구든지 이곳에 경건한 예를 갖추기를 바랐다.
<대소인원개하마비 (大小人員皆下馬碑) : 모든사람은 말에서 내려라. 궁궐, 종묘, 향교, 문묘 들의 앞에 세워진 표석이다. 이 표석앞에선 왕도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한다.>
충무사안에 세워져 있는 관왕묘비엔 이 곳에 대한 유지가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내용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는 일찌감치(1960년 국가고적 지정,1963년 사적지정)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관리가 점점 더 소홀해지고 있다. 또한, 그 보존과 자원가치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지은 관우사당이 지금의 충무사로 바뀌기 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유서깊은 유적지가 어떻게 변화되었고 그변화의 의미는 무엇이며, 앞으로 이곳을 어떻게 가꿔가야 할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도 고민하고자 한다.
관왕묘가 무엇인가?
[관왕묘 (관우 묘당) [關王廟]
[1791년(정조 15년)에 왕께서 탄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1792년(정조16년) 왕명으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의 부총관 등자룡을 아울러 배양케 하고 곧이어 1801년(순조1년)에는 수호암자의 이름도 옥천사라 고쳤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어 제사도 끊기고 말기에는 관우의 상까지도 바닷물에 던져 졌으나 불상만은 건져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해방 후 관왕묘 옛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충무공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종 목 | 사적 제114호 |
명 칭 | 묘당도이충무공유적(廟堂島李忠武公遺蹟) |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
수량/면적 | 8,264㎡ |
지 정 일 | 1963.01.21 |
소 재 지 |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산58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완도군 |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水軍都督 陳璘) 휘하 조·명연합수군이 진을 치고 왜군을 물리쳤던 전적지이다.
1598년(선조(宣祖) 31) 2월 충무공 이순신이 고하도(高下島)로부터 약 8천명의 수군을 인솔해와 현지에 진을 친 다음, 그 해 7월에 명의 원군으로 참전해온 진린도독 또한 약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당도하여 가까운 묘당도에 진을 침으로써 양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9월 15일 우리 수군부대가 현지를 떠나 전라좌수영 방면으로 군사를 옮길 때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이곳은 조·명연합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충무공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의하면, 「고금도(古今島)에 진(陣)을 옮겨오니 군사지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 군량을 공급하는 것도 편리하여 여러모로 이로움이 컸다. 그리하여 남도의 백성 수만호가 공의 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이때 우리 수군의 위세가 지난날 한산진(閑山陣)에서 보다 열배나 더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수군의 군세가 크게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묘당도(廟堂島)에는 이충무공을 제향(祭享)하는 충무사가 있고 그 수호사(守護寺) 성격을 띤 옥천사(玉泉寺)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충무사는 1598년 명의 수군이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던 당시 진린도독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한 데서부터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의 꿈에 나타난 관운장(關運將)을 제향하여 휘하 장병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684년(숙종(肅宗) 10) 전라도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이 이 관왕묘를 중수한 뒤 사액(賜額)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후 1710년(숙종(肅宗) 36) 판부사 이이명(判府使 李이命)의 주청에 의해 비로소 국가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조정으로부터 제관을 보내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 관왕묘는 1781년(정조 (正祖) 5) 왕의 꿈에 현몽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정조가 「탄보묘(誕報廟)」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는데, 이충무공과 함께 진린(陳璘)이 배향되어 오던 이곳에 명장(名將) 등자룡(鄧子龍)이 추배(追配)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고 옥천사가 처음 지어진 것은 1666년(현종(顯宗) 7)이었으니 당시 전라우수사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 중수(重修)를 위해 자재를 모아 승 천휘(僧 天輝)로 하여금 건물을 보수케 하는 한편 그 곁에 암자 하나를 지어 묘(廟)의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그때까지 보존되었던 관왕상(關王像)과 위패 및 각종 유물들이 모두 바닷물에 던져지고 단지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白雲寺)에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전한다. 해방 후 관왕묘가 있던 옛터에 충무사를 건립, 이충무공을 제향하였는데 이때 임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을 추배(追配)하였다. 1971년 충무사의 신실과 동재·내삼문·비각 등이 이루어진 뒤 1975년에 동재와 외삼문이 신축되었고, 1981년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위와 같이 관왕묘는 국가차원에서 관리되었다. 관우신앙과 맞물린 옛날엔 관우와 진린,이순신을 함께 모셨다가. 등자룡도 함께 배향하게 되다가 그 맥이 일제의 국권침탈로 끊기게 된다. 광복후 충무사로 거듭나면서 이충무공과 공의 조방장이었던 이영남장군을 함께 모시게 된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관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복원할 필요가 있다. 관왕묘를 복원한다면 한.중.일 사이의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삼국의 역사를 다시 살피고 정확한 역사인식을 함으로써 역사, 문화 교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옥천사도 다시 들어와 수호사찰로서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주찾는 곳이 될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면서 충무사 관리도 더욱 잘 될 것이다. 또한, 언제든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참배하고 주변시설을 이용하고 쉬어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묘우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정유재란때 한중일의 역사를 품고 예나 지금이나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얼이 숨쉬고 있는 곳.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 충무사. 이곳은 살아 있는 우리의 역사이다. 충무사는 더 풍부하게 거듭나야한다. 정조의 치제문을 인용한다.
탄보묘 치제문 - 정조
천하에 있어 이 사당은 / 廟於天下
비유하자면 땅에 있는 물과 같으니 / 譬在地水
조선의 어지러움을 / 左海蓁蓁
또한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네 / 亦不我鄙
적토마를 타고 푸른 칼자루 장식으로 / 赤駒蒼鐔
동남을 진무(鎭撫)하니 / 鎭于南東
충을 사모하고 의에 복종하기는 / 慕忠服義
천하가 다 함께하는 바로다 / 九州攸同
이 은혜와 이 덕이 / 之恩之德
기자(箕子)가 봉해진 이 나라에 몹시 지극했으니 / 箕封若偏
땅은 비록 만 리나 떨어지고 / 地雖去萬
해는 비록 천 년이 지났으나 / 歲雖過千
공손히 생각건대 현성은 / 恭惟顯聖
일본 섬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 島夷破膽
이에 이 땅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 乃安斯土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응했네 / 有叩必感
수복(壽福)을 내려서 / 壽而福而
우리나라를 외 덩굴처럼 면면히 이어지게 하니 / 緜我瓜瓞
이 나라의 중외에 / 環以中外
향사를 받드는 곳이 한곳만이 아니로다 / 享祀非一
아, 혁혁하고 신묘한 위엄이 / 於赫神威
이 땅에 가장 드러났으니 / 最著此地
빛나는 편액 찬란하게 / 金扁焜煌
탄보 두 글자로써 표시하였네 / 二字以識
오랜 세대 후에 관왕의 영향을 따른 이로서 / 曠世下風
진린(陳璘)과 이순신(李舜臣)의 위패를 함께 배향하니 / 陳李之祠
혹 천자의 위엄에 의지하기도 하고 / 或仗皇威
혹 수군의 책무를 이루기도 하였네 / 或濟舟師
크고 높은 공렬이 / 豐功偉烈
일체로 인근에 있으니 / 一體隣近
하루저녁 사당의 문에 / 一夕廟門
바람이 매섭고 조수가 노했네 / 風烈潮憤
예에 미처 겨를이 없어서 / 禮有未遑
등 총병(鄧摠兵)을 이제서야 추배(追配)하니 / 鄧乃追躋
사람이 백중의 형세에 있고 / 人居伯仲
은택이 백성에게 고루 미쳤네 / 澤均黔黎
왕이 실로 임하여 / 王實臨止
마땅히 허여할 바에 있는지라 / 在宜攸許
산하의 기운이 엄숙하니 / 山河氣肅
고하는 의식을 이에 거행하네 / 告儀是擧
아름다운 혼령과 굳센 넋이 / 英靈毅魄
황홀히 좌우에 모시는 듯하니 / 怳侍左右
가만히 보살핌을 거듭 베풀어 / 申錫冥庥
매우 후하게 하길 바라네 / 俾爾孔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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