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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해전! - 한중일 세나라가 고금도에서 만나다.

by ☆ Libra 2010. 9. 8.

 진왜란은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진다. 당시 지배계급의 해이는 한반도를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몰고 갔고 (왜 10만양병설을 무시했는지) 그때문에 이땅의 민중들은 나라가 보호해주지 못한 삶을 지키려고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우리의 수군과 의병, 명나라 구원군이 똘똘뭉쳐 막아낸 해전. 바다에서 왜는 기를 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정왜기공도 - 임진왜란의 생생한 장면을 중국의 종군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현장감이 넘친다.


 

 이순신의 빛나는 해전사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하는 고금도해전, 역사가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기에 우린 400여년전, 이 땅에서 한중일이 만났던 이 역사적사건을 다시 끄집어 낼 수 있다. 고금도는 정유재란때 우리수군의 통제영이었다. 또한, 이곳에 명나라 구원군 5천명이 함께 연합군을 결성했던 장소이다. 고금도 통제영은 조명연합군이 왜를 물리친 고금도해전이 있었고 전세가 기운 일본이 물러갈 때 쐐기를 박았던 노량해전을 준비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마무리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수군의 전열을 정비하고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쫓아서 섬멸하고자 했다. 고금도 전투는 그런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조명 연합군은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섬멸한다. 

 임진왜란 후 동아시아 3국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더욱 성장한다. 한편, 조선과 명은 전쟁의 폐해로 청나라에게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명이 망하자 고금도에 왔던 명나라 장수 진린의 후손은 고금도에서 조상의 발자취를 찾다 아예 해남땅에 정착했다는 후사가 애틋하게 전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세력판도를 바꿔놓았다. 결국, 일본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지않아 다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된다. 

 한중일, 세나라는 역사적으로 애증의 관계를 함께 해왔다. 임진왜란때 조선과 명은 연합군을 결성하고 일본은 대륙진출의 야망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 역사의 한가운데 조선,명,왜 세나라가 만났다. 고금도해전이다.
이순신장군의 유명한 해전들 속에 묻혀있는 고금도 해전, 짧은 기록으로 사료에 남아있지만 그 의미는 매우 크다. 

 한중일의 지난 역사를 알고 앞으로 한중일관계를 전망해보는 것, 동아시아의 미래를 준비하는 파트너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를 지난 역사가 가르쳐 줄 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금도엔 이순신의 위대한 영혼과 그의 죽음을 함께 한 민중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고금도 해전은 1598년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한 해전으로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2월부터 이순신은 고금도에 내려와 진을 치고 있었는데, 8월 왜군이 고금도로 침입해 들어오자, 이순신이 직접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적중으로 돌격해 대파한 해전이다.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강진의 고금도(현재  완도군)로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했다. 8월 1일, 이순신은 진린과 연회를 벌이려고 하던 중 왜군 함대가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는다.


 고금도해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1657년에 새로 편집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1년 8월 1일 갑인)에 이렇게 전한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적병을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서 크게 격파했다. 이순신이 진린(陳璘)과 더불어 연회하려고 하는데, 적이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돈해 대기하게 하였다. 얼마 후 적선(賊船)이 크게 이르자 이순신은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적중으로 돌격해 들어가면서 화포(火砲)를 쏘아 50여 척을 불사르니, 적이 마침내 도망하였다.”

 
 고금도는 해수로의 요새지였는데, 고금도해전 이후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 방면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열 배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