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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Wando고금도Gogeumdo

고금유림의 요람 6원사를 찾아 - 숭유사

by ☆ Libra 2010. 9. 17.

 조선은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베풀었다. 조선의 정치,사회,문화를 통틀어 유학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이 따라야 할 양식이었다. 각 지방마다 유명한 서원이 있었고, 서당은 보통사람들의 기초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원(院).사(祠) 는 이러한 유교문화가 낳은 것으로 기품있는 스승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섬이라하여 유학의 가르침이 미치지 않을 것인가? 고금도는 유배지인 까닭에 중앙의 사대부들이 수없이 다녀갔다. 정쟁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이곳에 온 사대부들은 유배가 풀리기도 하고 아예 이곳에 정착하기도하고, 중앙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치기도 했다. 고금도사람들은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고금도는 완도의 다른 섬들에 비해 유풍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금도에 있었던 서재와 사숙을 보면, 정의재(상정리), 가마재(가교리), 덕암재(덕암리), 월호재(척찬리), 벽호재(교성리), 서남재 (회룡리), 경의재(회룡리), 의성재(덕암리), 연남재(장풍리), 망화재(청룡리)가 있다.
지금의 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다.


 유배온 지식인들은 지역민들에게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퍼뜨렸고,  지역에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선비들이 하나 둘 생겨났으며, 그들이 마을마다 작은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스승의 학풍은 후학들에게 계속 전해져왔다. 이러한 유교적 학풍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오는 동안 작아지거나 사라졌다. 이제 우리주위엔 유학의 향기가 물씬 풍기던 옛 서당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다만, 옛스승들을 추모하고자 사당과 강당터에 후학들이 세운 추모비가 옛선비의 이름자만 가르쳐주고 있을 뿐이다. 
 
 고금도에는 이런 원사가 6개 있다. [각주:1]가교리의 숭유사, 연동리의 영모사, 덕암리의 덕암사, 화성리의 덕산사, 봉암리의 봉암사, 그리고 성격은 다르나 충무리의 충무사가 있어 오늘날, 사람들이 6원사라 일컫고 있다.


숭유사는 고금면 가교리에 있다. 1924년 고장의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됨.
후학의 교화에 힘쓴 분들 5위를 모시고 있다.

모시는 분들 :

신제 정재문,
동포 정재규,
송설당 정재삼,
율헌 배응규
우은 배응언

* 정재문 - 문과에 급제 송강재문하에 입문,대소쿠리 도시락하나,표주박하나 몸에 지닐 뿐 풍체 높은 범인.

* 정재삼 - 자는 태향,호는 송설당

* 정재규 - 자는 신원,호는 동보로 유일 재문의 동생.신제 문하생인 배움의 세습가정을 위하여 군의 사표로서 방촌(사방1치를 이름 즉 소량) 의 형연(빛나는 사연)을 가졌으며 추월한강이란 문집이 있다.

* 배응규 - 이름은 한규, 호는 율헌, 분성 배씨 극수의 후예. 회계 조병만의 문하생으로 은거하면서 후진교육에 힘씀. 

* 배응언 - 이름은 영규, 호는 우은,배응규의 종제이다. 회계 조병만의 문하생으로 은은간간하고 빙호지자로 포백의 문장을 구사.

*가마재 - 가교리에 후진교육을 위하여 건립 훈장에 정재문,

*벽호재 - 교성리에 있었다. 훈장은 배응규


 숭유사곁, 강당 건물에 있는 지영당. 이곳은 스승들이 묵었던 곳이다.



 강당. 학생들의 공부방이다.


 고금역사연구회원들이 이곳에서 어린시절 수학하신 배상호 어르신과 현 도유사 정충갑 어르신, 다년간 이마을 이장을 역임한 안돈순 어르신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典童文物室中明


禮樂威儀墻內備


敦仁傳義天人立


孝父忠君家國平


 고금역사연구회가 지역문화유적찾아보기로 진행한 숭유사탐방. 어르신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했다. 지금이라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오늘에 이르러 이러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 내야 한다. 6원사중 이곳만 향토유적에 등록되었다고 하나, 이나마 관리보존에 문제가 많았다. 마을어르신들이 이곳을 유익하게 활용하고자 관계기관에 어렵게 문서를 작성하여 관리대책을 건의했으나 담당공무원은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곳의 활용방안을 다시 얘기하여 이곳이 사라지는 옛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값진 유산으로 살릴 방법을 찾아야겠다.
  1. 고금면 가교리에 있는 숭유사는 1924년 고장의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향토유적으로 지정됨. 후학의 교화에 힘쓴 분들 5위를 모시고 있다. *가마재 - 가교리에 후진교육을 위하여 건립 훈장에 정재문, *벽호재 - 교성리에 있었다. 훈장은 배응규 모시는 분들 : 신제 정재문, 동포 정재규, 송설당 정재삼, 배응규 배응언 *정재문 - 문과에 급제 송강재문하에 입문,대소쿠리 도시락하나,표주박하나 몸에 지닐 뿐 풍체 높은 범인. *정재삼 - 자는 태향,호는 송설당 *정재규 - 자는 신원,호는 동보로 유일 재문의 동생.신제 문하생인 배움의 세습가정을 위하여 군의 사표로서 방촌(사방1치를 이름 즉 소량) 의 형연(빛나는 사연)을 가졌으며 추월한강이란 문집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