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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Wando고금도Gogeumdo

고금유림의 요람 6원사를 찾아 - 영모사

by ☆ Libra 2010. 10. 3.
 영모사는 고금면 연동리에 있다. 이 마을은 순조 11년, 홍병례선생이 귀양살이 하면서 지형이 처마밑 제비집과 같다하여 燕巢洞(연소동)이라 지었다가 지금의 연동이 되었다. 
 영모사는 이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좁은 길로 올라가야 한다.
비명) 용남 홍선생 수암 배선생 화정 윤선생 기념비
1963년 3월 건립.
비문 요약)

 용남 홍선생의 휘는 병례, 자는 경지, 남양인이다. 가계는 잘나가던 명문세족이었으나 사화를 입어 순조 11년(1810년)에 유배오다. 고종 갑자년(1864년)에 유배가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그 문하생 대표 배경룡, 정한교, 배의정, 김이의 등이 의로써 봉양하며 영모사를 지어 중양제를 지내고 있다.

 수암 배선생의 휘는 학연, 자는 도명, 성산인이다. 농상리 출신으로 정절공 극렴의 후예이다. 공이 죽은 3년 후 병술년(1886년) 가을 문하생이었던 박영규, 배지철이 영모사에 봉안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화정 윤선생의 휘는 세용, 자는 사현, 파평인이다, 서울에서 출생, 문숙공 최후의 후손이다. 광무4년(1900년)에 이곳 완도에 유배오다. 글솜씨가 뛰어나 향리인근에 따르는 문하생이 수십명이었다. 광무10년(1906년) 귀양에서 풀려 경성으로 돌아가서 191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문하생 정대유, 황권우, 김영오 등이 부인과 함께 영모사에 모셔 중양제를 지내고 있다.

 이상의 세 선생은 학문에 특출하고 유학에 밝으며 가르침을 통하여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시었다. 그러한 학자의 뜻을 기리고 받들기 위하여 비에 새기어 건립하니 그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영모사는 연남재라는 사숙을 세워 고금도민들을 가르친 홍병례를 배향하는 사당으로 시작하였다. 홍병례는 1811년 곡산부민 봉기사건으로 고금도에 귀양와서 고종원년 1864년 유배가 풀린 후로도 고금도에 적거하면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홍병례선생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여러자료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곡산부민봉기사건이나, 홍경래의 난과 관련됐다하지만 역사적인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음은 홍병례선생에 대한 자료들이다.
 
 學行
홍병례(洪秉禮)
자는 敬之경지요 호는 榕南용남이다. 남양 홍씨 석벽 춘경의 후예로서 도암연원의 덕행이 순정하여 오경의 문예를 무불관통하여 적거하면서 본군문화를 진흥하였음으로 영모사에 제향하고 있다.[각주:1]

 용남 홍선생의 학문은 인근지역에 널리 알려져 이름있는 후학들이 넘쳐났다. 예암 김기일(완도 청해사에 배향,수암 배학연(고금 영모사에 배향),화정 윤세용(고금 영모사에 배향)이 그들이다.

 홍병례(洪秉禮, 본관:남양, 아호:용남(榕南), 생존시대:조선 후기)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경지(敬之)요 호는 용남(榕南)이다. 석벽(石壁) 충정공(忠正公)의 후예이며 사판(事判) 이체(李締)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고, 경사(經史)에 심전하여조선조 순조 때 관직에 높이 올랐다. 홍경래난(1811) 때 고금도에 유배되어 다년간 많은 문인을 배출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문화 진흥에 기여한 바 현저하였기에 1848년에 지방명유(地方名儒)들이 연동(燕洞)에 영모사(永慕祠)를 창건하여 홍선생의 비(碑)를 모시고 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 고금도 연동으로 유배왔다.1864년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이곳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사망하였다. 연동에 위치한 영모사는 홍병례와 그의 제자였던 윤세용, 배학연등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화정 윤세용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편액이다.
 고금역사연구회원들이 김기오(전 고금노인회장), 정정의(현 영모사 도유사) 어르신을 모시고 영모사를 둘러보고 있다.  김기오어르신은 고금면의 원사중에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지 않은 4원사(영모사,덕암사,봉암사,덕산사)도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바랬다. 
 영모사는 고금도의 5원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이곳 뿐만아니라 인근지역에서도 유림들이 찾아와 번성하였던 유학의 산실이었다. 옛날엔 유림들이 마르고 닳도록 드나들었고 후학들이 해마다 음력 9월 9일 제를 모실 때면 300여명의 찾아올 정도로 추모객이 많았는데 시대가 흘러가고 지금은 이렇듯 처연하게 제사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무엇보다 관리가 급하다. 허술하고 쓰러질 듯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루바삐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해야 한다. 
 
 지역민들이 이 유적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학생들의 지역문화재 찾기, 조사활동, 문화유적가꾸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방학을 이용해 서당을 운영, 지역의 유학자를 선생님으로 모셔 옛학문과 서예, 예절교육같은 전통문화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면 좋겠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어르신들과 같이 하는 게 좋겠다. 유교축제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지역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있겠다.
  1. 조선환여승람 학행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