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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지를찾아> 사적 114호 이충무공유적지 - 완도군 고금면 충무사

by ☆ Libra 2010. 1. 7.

 


 
- 유적보존위원회 매년 충무공이순신 탄신제와 순국제 모셔


 지난 3일, 완도군 고금면 충무리에 있는 사적 114호 충무사에서는 제 411주년 충무공 이순신장군 순국제를 지냈다.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회(사단법인)에서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송주호 도의원, 김부웅 군의원과 지역사회 기관단체장들과 지역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통제례 양식으로 엄숙히 치러졌다.

 


 제례를 마치고 김영관 이충무공유적보존위원장은 식사에서 이충무공의 일생을 회고하고 지역민의 관심으로 충무공유적지가 우리 모두가 소중하게 가꿔가는 유적지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행사를 준비해온 유적보존위원회 이상철 총무는 “해마다 제를 모시지만, 점점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 안타깝다. 우리지역의 자랑스런 유적지를 보호하고 더 많이 알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마광남(완도군 장보고연구회 이사장)씨는 전통제례양식으로 치러지는 만큼 제례의식을 고증을 통하여 좀 더 정확하게 해야겠다고 말했다.


 1960년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면의 이충무공유적지 충무사일대는 임진왜란때 우리수군의 마지막 본영이 있었던 곳이다. 이순신장군과 명나라의 진린장군이 본진으로 개발하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준비하면서 그 흔적을 남겨놓아 나라를 지키려는 선열의 얼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던 덕동리의 망덕산, 수군들의 군사훈련장이었던 화성리 앞바다, 위장술을 써서 왜적을 얼씬 못하게 했던 우장섬, 수군들의 식수원이었던 어란정등이 있다.
 

 특히,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그 유해를 83일간 가묘로 모셨던 충무리의 월송대엔 풀이 돋지 않는 등 아직도 이충무공의 기개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명나라장군 진린이 관왕묘를 이곳에 세운 것이 충무사의 기원이다. 처음엔 중국의 관운장을 모신 사당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종때 이충무공과 진린을 함께 모시다 정조때 임금의 친필로 탄보묘 현판을 내려 등자룡까지 함께 추배하게 된다. 평년에는 강진현감이 제사를 모셨고, 임진왜란이 있었던 임진년에는 병영병사가 제사를 모셨으며 강진,장흥,보성 등의 현감들이 참석하여 참여하는 등 성대하게 진행되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그 맥을 잇고 있다.


 이곳은 충무공과 같은 날 전사한 이영남장군도 함께 제배하고 있는데 이영남장군은 가리포(지금의 완도) 제56대 첨사를 지내다 이순신장군의 좌선봉장이 되어 공을 세웠다.

충무사유적보존위원회에서는 해마다 두번 이충무공의 탄신제(양력 4월 28일)와 순국제(음력 11월 19일)을 기념하고자 성대하게 제례를 모시고 있다.


 이충무공은 ‘약무호남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란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남해안 일대의 백성들과 수군들이 한마음이 되어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충의 의기가 서려 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충무사는 임진왜란의 막바지에 노량해전을 준비하고 출전했던 청해인(완도사람의 옛말)의 정기가 서려있는 역사유적지이다. 한때 이곳은 이충무공의 유물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었지만, 일제와  무분별한 문화재의 유출(현충사로 옮기거나 분실)로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행이 전진도첩(수군의 전략지도)만이 남아 있다.


 그 역사적인 뜻을 살려나가기에 지금의 충무사 일대는 유적지로서 너무 초라하다. 다시 그 위용을 빛내야 한다. 구체적이고 발전적인 유적지의 개발과 활용방안이 아쉽다.
 kpprcamp@hanmail.net


충무사 들어가는 길 - 묘당도라는 섬이었다가 간척지로 되었다. 70년대에 천일염을 생산하기도 했던 곳이다.

사당을 수호하라는 명으로 지어졌던 옥천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