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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Wando고금도Gogeumdo

<섬기행>완도군 신지도(薪智島) - 남해안의 대표 휴양지, 명사십리가 있는 곳

by ☆ Libra 2010. 1. 1.
유배지의 한이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우뚝 서다.


 완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지도, 북으로 고금도와 조약도(약산면), 생일도와 평일도(금일읍)가 동편에, 남쪽으로 청산도가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길다란 모습이다. 서쪽에 상산(324m)이 우뚝 솟아 동쪽으로 향하고, 산줄기는 섬의 가운데 잘룩한 허리의 평지인 대평리를 지나 동쪽으로 노학봉(225m)을 이루다 바다로 들어간다.


 지난 2005년, 신지대교의 개통으로 신지도는 인접한 완도읍과 사회, 문화, 경제의 공동체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보배로운 땅이다. 전국으로 알려진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더욱 쉽게 찾아 갈 수 있는 곳이 되고, 완도의 대표관광지로 관광완도의 메카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해수욕장주변의 드넓은 지역엔 소나무 숲과 명사십리 바다의 아름다운 모래가 사람들을 맞이 한다.


 신지도(新智島)란 이름은 1470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 지도(智島)로 표기되다가 17세기에 수군만호가 설치되면서 다시 신지도(新智島)로 나타난다. 그후로 지금까지 써오고 있는 신지도(薪智島)가 된 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도 현지인들은 신지도를 지도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섬의 형태가 동서로 길게 늘어져 긴섬<진섬<지도로 변했다는 얘기와 새로운 지도란 의미로 신지도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이곳은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엔 절해고도였을 이곳에 총 46명이 유배생활을 했다.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중앙권력에 밀려 유배된 사람들이다. 중앙의 권력자들이 정적들을 멀리 추방했고, 유배지중의 유배지인 섬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요한 위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절도유배지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관의 통제가 미칠 수 있어야 하고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이 갖춰져야 했다, 절도정배지로 이용되었던 섬들은 이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그만큼 살만한 곳이었으며, 수군만호진같은 관방의 설치는 유배인의 통제가 가능하게 했다. 중앙 권력의 핍박으로 쫓겨난 그들의 한은 문장으로 예술로 승화되고 유배지엔 유배인물의 추종자들이 찾아오고 그들의 학문과 문장은 현지인과 섞여 유배지를 중심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또한, 그들이 남긴 시와 문장으로 당시의 사회상과 권력의 뒤안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지도는 17세기부터 200년간 조선후기의 숱한 선비들이 유배를 다녀갔는데 그 중 정호(송강 정철의 현손으로 ‘지도의 위리안에서’라는 오언절구를 남김), 이광사(동국진체의 서예대가, 서법이론서 서결을 신지도에서 완성), 정약전(정약용의 형으로 8개월을 살다 흑산도로 이배됨), 윤행임(신지도에서 보고 듣는 데로 쓴 글이란 석재별고를 씀), 이세보(시조작가, 신도일록에 유배지생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 지석영(문신이자 의사,국어학자,종두법) 등이 신지도에서 행적이나 기록이 드러난다.

 지난 2008년, 신지면지 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신지면 향토지를 만들면서 묻혀 있던 자료들을 발굴하고 문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배인물들이 서남해안지역에서 겪어온 삶의 모습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중요인물들의 관련기록을 해석하고 새로운 사실을 찾아 냈다. 그런 면에서 신지면 향토지의 발간성과가 매우 컸다. 이런 작업을 다른 섬에서도 같이 병행해서 완도군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뭍사람들의 섬사람에 대한 구박은 근거 없는 한낱 기호일 뿐이다는 것이 이러한 역사찾기 작업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신지도사람들의 역사인식은 남달랐고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 맞선 선각자들과 함께 신지도는 항일운동의 성지로 우뚝 서게 된다.


 

관광, 휴양, 문화, 역사의 중심지로 가꿔 볼 만한 곳

명사십리 해수욕장 주변 활용해야


 완도의 항일운동은 각 면에서 교육과 계몽운동으로 시작한다. 1920년대엔 소안도와 신지도를 중심으로 항일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그 가운데에 소안도의 송내호선생과 신지도의 임재갑선생이 있다. 1921년, 임재갑선생은 신지도에 사립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름있는 전국의 운동가들이 완도 신지에 모여들어 교사로 참여해 민중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는다. 소안학교와 교류로  양교가 연합운동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자 이곳 젊은이들의 단체인 신지면청년회와 소안배달청년회가 해마다 8월15일 광복절에 체육대회를 하면서 지금도 그 얼을 이어가고 있다. 임재갑선생은 국내의 단일항일운동조직인 신간회의 완도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그 주축 인물이었던 신지 송곡출신인 장석천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신간회 광주지회간사와 전남청년연맹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한 인물로 1935년 형무소복역중에 죽기까지 지사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20년대 소안과 신지를 중심으로 했던 완도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신지사립학교 폐교, 이어 소안사립학교마저 폐교되면서 이후 고금도와 약산도에서 지하운동을 펼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격렬한 항일운동을 했던 군단위로 완도와 함경도 북청과 경상도 동래를 꼽는다.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완도군 항일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00년에 ‘완도군항일운동사’를 펴내고 항일운동의 성과를 안팎에 알리기도 했다.


 덧붙여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완도의 역사를 기념하는 항일운동기념관이 지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거기에 알맞은 장소가 신지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 주변이다. 신지도는 대도시와 접근성이 좋고, 2010년 신지와 고금간 다리가 착공되어 완공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신지도를 목적지로 찾아 올 것이다. 옛날 이세보의 유배여정 그대로 강진, 마량을 거쳐 고금도를 지나 신지도로 갔던 유배여정이 이젠 다리로 연결되어 도시인들이 쉽게 드나들며 찾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그 목적지가 명사십리 해수욕장. 모래가 파도에 씻겨 우는 소리가 10리나 들린다고 하여 명사십리 (鳴沙十里)라고 한다. 해수욕장은 깨끗한 모래와 주변에 소나무 휴양림이 드넓게 분포되어 있다. 2005년 신지대교의 개통이후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이 크게 늘어나 해마다 100만명을 넘어선다. 완도군의 유명관광지인 보길도가 이 영향으로 한 때 한적하기도 했다. 전국 최대 규모의 유채꽃단지가 조성되어있어 지난 4월, 청산도의 세계 슬로우 걷기 축제프로그램인 걷기 행사에서 유채꽃이 만발한 장관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명사십리해수욕장 주변은 그 규모가 커서 가꿔야 할 자원과 조건이 잘 맞아 떨어진다. 해수욕장 동쪽에 위치한 조선대학교 해양생물연구교육센터를 주위로 여러 숙박시설이 있다. 이곳이 휴양지구가 될 전망이다. 이러한 휴양과 연구, 문화 중심의 컨텐츠를 개발하여 유치해야 한다. 피서철만 북적이다가 그후론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방치된 바닷가가 아니라, 늘 찾아오는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명사십리 주변의 드넓은 장소를 활용하는 지혜를 모아야한다. 


 섬의 동쪽 끝에 동고마을이 있다. 동고마을은 신지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어선 수도 가장 많다. 이곳엔 아담한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 한때, 명사십리의 복잡함을 피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곰솔숲 사이에 자리를 펴고 바다를 내려다보며 운치를 즐길 수 있다. 주민들은 톳, 다시마, 청각같은 해조류를 가공하여 일본에 수출한다.

완도의 여느곳에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김, 미역가공공장은 한 시대의 번성을 알려주지만, 지금은 동네어귀와 선착장근처에 폐허가 되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바다양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르는 어업을 시작했다. 신지면은 90년대 이후부터 대규모 축양단지가 들어서서 지금은 넙치(광어)면이라 불리울 정도로 광어양식이 번성한다. 우럭, 굴, 다시마, 톳, 멸치같은 중점품목을 육성하고 특화해 주소득원이 되고 있다.


 신지면의 면소재지인 대평리와 명사십리주변에 상가가 집중되어 있지만 신지대교의 개통으로 대평리상권이 완도읍으로 흡수되는 공동화 현상이 보인다. 그럼에도 휴양지로서 관광자원, 역사의 획을 그었던 유배인물사와 항일의 역사같은 문화자원이 넉넉하기 때문에 신지도의 미래는 밝다. 그와 함께 완도군의 미래도 밝다고 하겠다. 관광, 휴양, 문화 ,역사의 컨텐츠 개발이 관건이다. 건강, 관광, 문화, 역사의 네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곳, 완도가 펼쳐야 할 목표이다.

 kpprcam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