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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Wando고금도Gogeumdo

관왕묘비문 해석

by ☆ Libra 2011. 12. 24.

 충무사들어서서 홍살문, 외삼문, 중삼문을 지나면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관왕묘비가 있는 비각은 서재 건물뒤에 있다. 안내표지가 없고 서재에 가려 비각이 보이지 않는다. 탐방객들은 이 비각을 놓치기 쉽다. 관왕묘비의 위치를 옮기든지 비각앞의 담장에 문을 내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많다. 우선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해야겠다.

 높이 253cm, 넓이 93cm, 폭 20cm로 1713년에 건립된 이 비는 충무사의 역사를 알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린장군이 관우사당을 세운 것에서 시작하여 이 비가 세워지기 까지, 관우,진린,이순신을 함께 배향하는 의미, 진린과 이순신의 사귐이 간담이 통하였다는 내용, 진린이 이순신장군을 극진히 존경하여 경천위지의 재라고 극찬하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關王廟碑
          
大匡輔國崇錄大夫   原任   議政府左議政   李頣命   撰
嘉善大夫三道統制使   兼   慶尙右道水軍節度使  李宇恒 書

古今島關王廟者   皇明水軍都督   陳公璘之所建也   神宗皇帝萬曆戊戌再發兵征倭陳公將廣東兵五千  與我統制使   李公舜臣  共禦海道來屯此島  廟建在其時也   及李公戰死於露梁   倭尊秀吉斃   
陳公振旅西歸  留餘財   托廟祀於島人   其後   歲久 廟傾   像昧  香火不至  時有舟子瀝酒禱風  我顯廟丙午 節度使柳斐然   傷其荒廢資募 綠僧  天輝  葺理瓦棟  傍置庵守之   復其俎豆  又從享陳李二公   於左廡事未聞于朝今上甲子  觀察使   李師命  增修廟廡  始請錫號降香  朝命下而  有司慢不行  庚寅 原任議政  李頣命  請申前命  以秩祀典禮官   大臣乃議曰   陳李之祠  在關王廟庭   關王  當與國家抗禮廟  不可宣以額  但宜具牲幣歲以驚蟄霜降之節  遣官幷祭  上可之  遣廟百年享禮始定於大報壇成之後  若有待而然斯甚奇矣  或曰  關公之廟于是而脤食  陳李其義如何 噫 關公 生柄大義  歿爲明神千秋正氣  拂爵於宇宙明興  盖多靈異  中國  至今家戶而戶  侑公靈如水  無不之矣 何獨不可祀于東土也  陳公 奉天討揚皇靈宜得神理之助順  況精誠之發  曠世可感乎 李公功聞天下  身殉國難  振華夏之威  殆庶幾焉  陳李之交 肝膽亦相照矣  易曰方以類聚  荀其類也  雖百世之久  萬里之遠  皆可聚焉  若三公之義烈  其可謂之非類乎  同問宮  共朕蠁何疑之  有昔夫子  修春秋而 欲居九夷  盖悲王跡之熄也  關公嘗好讀春秋  其雄魂可安於今日中土之腥乎將樂我東思漢之風乎  意其風罵雲車左都督  右統制  共臨聣于此邦  聖廟之因遺跡致禋祀  豈無其義也  嗚呼  傾天下之力而濟屬國  自有天子  諸侯以來  所未聞凡東征之日  營陣之地  雖處處 立祠俾我人  不忘舊恩  未或過也  而在陳公  尤有不可忘者  天兵  首尾十年  和議間之諸將莫下  爲其所誤  曳橋之役  水陸協攻 賊將 行長 幾可 擒之  劉提督綎  暗通和而遽解圍  公獨揚帆  向岸曰  我寧爲順天鬼  義不可捨賊且不鄙夷我將士   其敬李公  如畏友言無不從至  謂之  經天緯地之才  臨陣見其死  哭之甚哀 歸路 祭其柩此雖李公推功讓能以結其誠心  其奮勇  敵愾身樂賢眞  所謂師中之丈人  若同時諸軍府盡如公  豈使倭賊片帆東歸也  公還朝論功策一云  公廣東人  字朝爵  號龍崖  李公 德水人  字汝諧 其功烈  俱載公墓版及戰地之碑故  今不詳書  公之 曾孫光輔  爲水軍虞侯  損俸伐石 節度使  申璨 助其費  以書渴文  將樹於廟庭  今見享禮之成  始記廟事始末 申節度使  己歿  乃付掌事  僧處還  俾刻之

皇明  崇禎紀元後八十六年歲 癸巳十二月

 고금도 관왕묘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세운 것이다. 신종황제 만력 무술(1598년, 선조 31년)에 재차 발병하여 왜적을 정벌코자 진공이 광동병 오천을 거느리고 우리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과 함께 해상을 방어할 때 이 섬에 주둔하였는데 묘도 바로 그 때에 건립하였다.

 이공이 노량에서 전사하고 왜의 괴수 풍신수길도 죽었으므로 진공이 부하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 갈 때에 이 섬사람에게 여재를 털어주면서 묘사를 부탁하였는데 그 후로 여러해가 되니 묘우가 기울어지고 초상이 희미해지며 향화도 끊어졌고 다만 근해를 지나가는 선인들이 술을 올리며 순풍을 비는 것 뿐이다.

 우리 현종조 병오(1666년)에 절도사 유비연이 묘가 황폐됨을 애석하게 여겨 자금을 모아 승 천휘와 인연을 맺어 와동을 수리케 하고 그 곁에 암자를 설치하여 지키도록 하면서 다시 제사를 모시되 또 진, 리 이공의 좌무에 종향으로 모셔서 행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지 못하였는데 금상(숙종) 갑자(1684년)에 관찰사 이사명이 묘무를 보수하고 비로소 사호와 강향을 조정에 신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유사가 태만하여 시행치 않았다.

 경인(1701년)에야 좌의정 이이명의 신청으로 질사전례관과 대신들이 상의하기를 '진,리의 사당은 관왕묘의 뜰에 있는데 관왕은 마땅히 국가에서 예우해야 하나 묘에 사액함은 옳지 않을 듯하니 다만 생폐(제물 등)만을 갖추어 해마다 경칩과 상강의 절서에 제관을 파견하여 삼공의 제사를 봉행토록 합시다' 하니 임금도 '가한 일이다' 라고 하시어 유묘를 보존케 하고 백년향사하던 사당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결정케 되어 대보단[각주:1]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된 것 같으니 그렇게 된 것이 심히 기특한 일이다.

 혹자는 말하되 관공의 묘에 진공과 이공을 배향하는 뜻이 무엇일까 한다. 슬프다. 관공이 살아서는 대의를 밝혀 빛내고 죽어서는 명신이 되어 천추토록 정기를 우주에 떨쳤도다. 명나라에서도 영이스런 일이 많이 일어났기에 중국에서는 지금도 가가호호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공의 영은 물과 같아서 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찌 홀로 동토에서만 제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진공은 천의를 받들어 적을 토벌하고 황영을 선양하였으니 마땅히 신리의 도움을 얻을 것이며 황차 정성을 발하여 먼 세상까지 감동케 하는 이공의 공과 명성은 천하에 들려서 몸을 국난에 바쳤으니 화하에까지 위명을 떨치셨다.

 진공과 이공의 사귐은 간담이 서로 통했었다. 주역이 이르기를 방이유취란 말은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함이니라. 비록 백세의 오래됨이나 만리의 먼 길일지라도 다 같이 모여질 것이다. 더구나 삼공의 의열 그것은 가위 그런 류가 아니겠는가? 같은  사당에서 함께 향배함이 무슨 의심할 바 있겠는가?

 옛날에 공부자께서 춘추를 지으시고 구이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심은 본토내에서 교화가 부진함을 탄식하고 슬퍼하심이니라. 관공은 일찌기 춘추읽기를 좋아 하였으니 그웅혼이 오늘날 중국의 혼탁한 곳에서 가히 안존할 것인지? 아니면 장차 우리 동토에서 한나라를 사모하는 풍류를 즐거워 할 것인가? 생각컨데 그 병마가 진도독과 이통제사가 이나라에 같이 오게 된다면 성묘에 유적으로 인하여 인사정성드려 제사함이 어찌 그만한 의의가 없으리오.

 오호라, 천하를 기울이는 힘으로 속국을 구제한다는 것은 천하와 제후이래 들어보지 못한 바이다. 무릇 동정의 때에 영진의 땅 곳곳에 사당을 세워 우리들로 하여금 구은을 잊지 않게 한다 하더라도 혹은 과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진공에 있어서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천병이 수미 십년동안에 화의를 꾀하는 자도 있어서 그릇된 바도 없지 않았다. 예교의 싸움에서 수륙으로 협공하여 적장 행장을 몇 번이고 사로 잡을 수 있었음에도 유제독 정이 암통하여 포위를 풀어 주었었다. 이때 공만은 홀로 돛을 올려 연안으로 향하면서 "차라리 내가 천리에 순종하여 죽어 귀신이 될 지언정 의를 저버리고 적을 놓아 줄 수는 없다" 라고 하였으며 또한 우리 장사들을 경멸히 여기지 않았고 그가 이공을 극진히 존경하며 경천위지하는 재라고 까지 말하면서 그 의사에 따르지 않는 바 없었다.

 진두에 임하여 이공의 순사하심을 보고 심히 슬퍼하며 곡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 영구에 제사하였으니 이는 비록 이공이 공을 미루어 양보했던 결과에 성심을 다한 소치이기도 하지만 이공의 그 분용과 적개심 그리고 내 몸을 낮추고 어진 이를 존경하는 태도는 진실로 사중의 존장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그때에 모든 군부가 다 공과 같이 했던 들 어찌 왜적으로 하여금 편범인들 동귀케 했으랴? 

 공이 조정에 돌아가서 논공할 때 제일인자가 되었다. 진공은 광동인이요, 자는 조작이며 오는 용애이었고, 이공은 덕수인이요 자는 여해인데 그 공열이 또한 공의 묘판 및 전지의 비에 실렸으므로 이제 자세히 쓰지 않는다. 

 공의 증손 광보가 일찌기 수군우후가 되어 연금으로써 비석을 깍았고 절도사 신찬도 그 비용을 보조하여 글로써 비문을 새겨 장차 묘정에 세우려 하였는데 이제 향례가 이루어졌으므로 비로소 묘사의 시말을 기록하는데, 신절도사도 이미 타계하였는지라, 이에 장사승 처환에게 부탁하여 각한다.

 명 의종조 숭정원년(서기 1628년 인조 6년)으로 부터 그 후 86년 계사(39년 숙종39년,1713년) 12월 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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