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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인물사 - 용남 홍병례 선생

by ☆ Libra 2010. 10. 25.
 숨어 살다 간 비운의 유학자 용남 홍병례 - 그를 기리는 유림 넘쳐나 

 고금도 유배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가려 했다. 영모사에 모시고 있는 용남 홍병례선생도 그 범주에 들었다. 지금까지 그를 유배온 사대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병례는 유배온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은 홍경래의 난과 연루되어 귀양왔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고금역사연구회 http://cafe.daum.net/wandohistory 모임을 하면서 영모사의 내력을 조사하던 중 의문점이 있었다. 홍병례선생은 무엇과 관련하여 고금도에 오게 되었는가? 유배왔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야 한다. 홍병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찾을 수없었다. 사료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는 노파심에 인터넷을 뒤졌다. 마침내 실마리를 찾았다. 
 
 최근 용남 홍병례선생의 후손, 우헌 홍성호선생이 운영하는 블로그
http://blog.naver.com/uhune?Redirect=Log&logNo=30095598110 를 발견했고 홍성호 선생은 용남 홍병례선생의 관련자료를 메일로 보내온 것이다.


[각주:1]이렇게 관심 갖여 주시어 매우 고맙습니다. 제 족보에 명백히 병례가 계시고 1778년 정조를 시해 하려던그의 백부 홍량해의 죽임으로 집안이 몰락 했을 무렵 그는 19세의 나이에 몰래 그곳 고금도 연동으로 숨어들어 가게됬고 운둔 생활 하면서 후학들을 양성 하신 거죠 그의 조카 홍규섭 이 영모사 를 건립 할제 석축비용 건축비용을 부담 하였다는 후학들의 전언과 홍병례 비문 초본 기록 또한 갖고 있습니다 홍병례 의 유고 몇권과...가능 하다면 FAX 로 보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우연찮게 이렇게 뵙게 되어 매우 고맙고 감사할 따름 입니다,오늘 다음 까페에 가입하여 사진을 첨부 할려 했더니 게시판이 열리질 않아 올리지 못해 매우 안타깝네요.대신 이렇게 메일 보냅니다. 

 
용남 諱 홍병례는1761(辛巳)년~1839(헌종丙申)년9월7일 卒 하신것입니다. 墓 는 전남고흥 도양 비봉산下에있습니다. 중시조 해봉 홍명원-홍 처후-홍 수헌-홍 우해-홍 계백-洪 量海-성호 의7대祖 홍 定海-병선 병의 병례 병지  4형제중 셋째입니다.

 1778년 홍량해는 정조를 암살 하려다 체포(당시 세자 익위사 로있을무렵) 죽임을 당하고 전주완주 지역의 호남 이하 전국 노론의 와주 홍계희 집안은 겸사겸사 초죽음이 되고 노론이 와해 된 것입니다. 이때 저희 집안은 명문집안이 역적으로 뒤바뀌어 살아남는 것조차어려울무렵 홍 병례는 나이 19세 때 그 곳 고금도로 숨어 들어가 있었고(후에 上 甲子년에 모두사면복권이되죠) 

 5대조부 홍 圭燮과 休燮 형제가 장흥 장동 용곡 으로 가서 살다던 중 5년후 동생 휴섭은 화순으로 홀로가 자릴 잡았고 후손은 지금 있습니다. 형 규섭 손 역시번창하여 광주 서울등지에 살고 있는데 누구에 의해 홍 경래난을피해 그곳으로 갔다고 하는 지이해할수가 없고 문화원이나 군청공보과에 연락하여 수정을 바랐으나 김기오씨나 노인정에 말하라고 만하더군요.


 
 
  永 慕 祠 洪 秉禮 篇

諱 洪 秉禮 字 敬之, 號 榕南. 英祖辛巳 十月四日生. 憲宗丙申 九月七日卒(1761~1836). 墓 道陽 戌坐 合窆, 公 의高祖父인(1640~1711) 淡圃公 洪 受憲(文靖이라諡號를받음)은 吏曺判書 弘文館提學 入耆社 許卜. 公의 曾祖父(1676~1742) 禹諧(字汝和號竹隱)는 全州 高山縣監 洪川縣監 문화현령 을지냈으며 公의 祖父인(1699~1743.44壽) 洪 啓百 字 祥甫 號 색소와(索笑窩)은 洪川縣監및 原州 兵馬節制都衛(호구단자有함) 를 하셨고 白父인 世馬翊衛 洪量海. 字 道叔 號 堅窩又 剛齋.長湖.長州(1724景宗4~1778正祖2) 公은 正祖 가 즉위하여 僻派사건(영조의 처가세력 정순왕후와 풍산홍 사도세자 처가세력 혜경궁홍씨 경의왕후 세력간의정파싸움) 으로 禍를 입어 澹窩公 洪 啓禧. 啓能 述海 趾海 纘海 相間 相範 秉地 등이 줄줄이 禍를 입을무렵(1778年) 正祖 戊戌七月二十一日 설상가상 正言 韓後翼의 疏를 代撰하는일로 被禍하여 上甲子(1804年)七月 伸寃復官 됬으나 近族 으로 秉直 秉義 秉智 여러 兄弟 가 있었 으나 참혹하고 위급한 상황 이어서 秉禮는 當時 19世 의 나이에 지금의 완도 古今島燕洞으로 (1780년) 피신하였으며 從姪 인 圭燮.休燮 兄弟는 長興長東 으로 離居 한뒤 約 5年後 休燮은 和順 道巖面牛峙里에 安住 했음을 여러기록을 確認하여 알수 있습니다.

6世 孫 宇軒 洪 性浩 謹識. 011-9115-0067

  홍성호 선생이 보내온 자료를 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홍경래의 난에 연루해 유배왔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영모사경내에 있는 표지판의 오류는 수정해야 한다. 홍경래의 난과는 관련이 없으며 그의 생,졸년도와 고금도에서 당대인물들과 어떻게 교류했는지 살펴야 한다.

 용남선생은 고금도에 유배온것이 아니며 은거였으며 그가 고금도에서 유림들을 지도하는 동안 가난하지만 범상치 않았던 선비로 인근에 이름을 떨쳤다. 유배지이면서 아직도 고금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유교적전통은 홍병례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던 후학들에 이어진다. 후학들은 스승의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웠다.

 고금도에 남아있는 6원사, 그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영모사는 홍병례선생과 그의 제자인 배학연, 윤세용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용남 홍선생의 학문은 인근지역에 널리 알려져 이름있는 후학들이 넘쳐났다. 예암 김기일(완도 청해사에 배향),수암 배학연(고금 영모사에 배향),화정 윤세용(고금 영모사에 배향)이 대표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금도사람들이 전하는 홍병례선생은 산수지리학에 능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고금도 사람뿐만아니라 먼곳에서도 선생을 찾아와 수학했다고 한다. 매년 음력 구월구일에 제를 지낼때면 인근지역의 유림들이 함께 추모했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조사할 것 - 홍병례선생관련 사료 조사, 고문서 해석, 당대인물들과 교류내용, 후학들의 증언수집.

[각주:2]
學行
홍병례(洪秉禮)
자는 敬之경지요 호는 榕南용남이다. 남양 홍씨 석벽 춘경의 후예로서 도암연원의 덕행이 순정하여 오경의 문예를 무불관통하여 적거하면서 본군문화를 진흥하였음으로 영모사에 제향하고 있다.

  1. 용남 홍병례선생의 후손 블로그에 댓글 [본문으로]
  2. 조선환여승람 학행편 [본문으로]